이성수. 나에게 영감은 내가 어릴 적 스스로 찾은 ‘아버지의 책장 속 로댕’이다.

Moments of Inspiration
잊히지 않는 영감, 단 하나의 순간이 있다면?
길스토리 프로보노 9인에게 ‘영감의 순간’에 대해 물었습니다.

이성수
SOUNGSOO LEE / PAINTER

화가 이성수는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2003년부터 국내외에서 다수의 개인전 및 그룹 전을 열었다. 그의 작품에는 사람, 환상, 웃음, 공기, 바다가 있으며 그 안에 ‘나’와 ‘당신’이 있다. 환경, 동물, 사람이 존재하고 융합되는 그의 작품은 때로는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으로, 때로는 지독하게 차가운 얼굴로 다가와 무언가를 이야기한다.

‘처음’ 또는 ‘강렬하게’ 영감을 받았던 순간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.
___ 어릴 적부터 손으로 무언가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했어요. 프라모델, 레고, 모래, 종이 찰흙 등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것이면 결과물을 만들어 놓고 흐뭇해했던 기억이 납니다. 정신분석가인 아버지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(Vincent van Gogh)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신 후 예술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셨는데, 그 덕분에 우리 집 책장에는 여러 작가의 도록이 빼곡히 꽂혀 있습니다. 심심할 때마다 한 권씩 책을 빼서 오후 내내 보곤 했어요. 가끔 야한 그림과 엽기적인 이미지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죠. 저에게 책장은 공인된 일탈의 공방이자 상상의 화수분이 돼 주었습니다.
중간에서 위로, 다시 위에서 맨 아래 칸으로 책장의 책들을 정복해가고 있을 즈음, 처음으로 로댕(Auguste Rodin)을 만나게 되었어요. 그 몸서리쳐질 만큼 처절하고 생동감 넘치며 장엄한 조각들을 보고 저는 직접 저런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어렴풋한 욕망을 갖게 된 듯합니다.

최근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‘무엇’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.
___ 그때는 몰랐지만, 로댕의 작품은 삶과 죽음, 욕망과 숭고함, 폭력과 사랑을 관객에게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선보이고,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 특징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. 그래서 관객으로 하여금 진지한 사색에 빠져들게 만들고, 볼 때마다 새롭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. 관객의 상황이 달라지면 선택도 달라질 것이기에. 이 점은 제가 작품을 만들 때도 늘 염두에 두는 가이드라인입니다.
‘관객에게 선택권을 갖게 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.’
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더 이상 로댕의 조각을 따르고 있지 않아요. 장르도 다르고, 주제도 아주 다르죠. 저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, 또 다른 대가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필연적으로 조정되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. 그러나 어릴 때 홀로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했던 로댕의 감동은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어 그의 작품을 인용하게 합니다.

‘영감’을 받아 만든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.
___ 다음의 작품은 로댕의 <지옥의 문> 앞에서 느꼈던 저의 감상을 입혀본 작품입니다. 로댕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재를 단테의 <신곡>처럼 아주 무겁게 제안했습니다. 그러나 제가 상상하는 그 문은 커피 한잔하면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점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. 이것이 제가 로댕에게 받은 어린 날의 감동에 대한 최선의 반응입니다.
‘당신의 질문에 나는 이런 답을 선택하였습니다.’

493c862342a5fc8032462879252490bd_1650604245_9492.jpg
<At the gate_그 문 앞에서_핑크맨>이성수, 2011
오일 캔버스 | 215x320cm

나 이제 이곳에 올라 삶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.
인생은 욕망으로 가득했고, 욕망은 폭력을, 폭력은 후회를 갖게 하였습니다.
생각해보면 이 한 번의 인생이 무척 길기도 하였습니다.
많은 사람들, 많은 장소들, 그리고 예술.
내 인생이 이렇게도 풍성하였던 것은 영원 같은 순간들 때문입니다.
내가 만난 예술 작품과 예술가들, 내가 경의를 금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장소들, 그리고 사랑.

난 이제 이곳에 앉아 다시 인생을 논합니다.

욕망이 없었다면 나의 긴 삶은 지루했을 것이고,
영원과 함께 간직할 어떤 것도 남지 않았을 거라고.
다시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욕망으로 가득했고
욕망은 바람을, 바람은 그리움을
그리움은 영원을 맛보게 하였습니다.
<AT THE GATE>

나에게 영감이란?
___ 나에게 영감은 ‘내가 어릴 적 스스로 찾은 아버지의 책장 속 로댕’이다.

493c862342a5fc8032462879252490bd_1650604214_2862.jpg
<지옥의 문> 오귀스트 로댕(Aguste Rodin), 1880-1888
조각, 석고 | 94x400x552cm